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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는..........

독일 전함들의 이름 유래

전함을 만들어보려고 이것저것 자료를 찾다보니......

결국엔 이런 뒷배경까지 관심이 가게되더군요....

(출처 : http://battleship.ibbun.com/main.htm )


독일은 주로 유명인의 이름이나 지역명을 전함들의 이름에 사용하였습니다.

독일의 전투함 중 그나마 우리한테 잘알려져 있는것들만 추려 봤습니다.


그냥 심심풀이로 읽어보세요....

상식에 도움이 된다면 더 좋겠지만....

1. Bismarck, 비스마르크 [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4.1 ~ 1898.7.30]


독일 제국의 초대 총리로 독일 통일과 국가 발전에 공적이 있었다.

프로이센의 쇤하우젠에서 융커(지방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괴팅겐과 베를린 두 대학에서 공부한 후 프로이센의 관리가 되었다(1836∼1839).

베를린의 3월혁명(1848) 때는 반혁명파로 활약했고 보수당 창립멤버의 한 사람이었다.

혁명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1851~1859)로 임명되어 프랑크푸르트에 부임하였다.

그는 독일의 통일방식에 대해 오스트리아와의 협조를 주장하였지만 결국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갖게 되어 오스트리아와 자주 대립하였다.
1848 년 전후에 보수적인 정치가에 불과하였던 그는 러시아 주재대사(1859), 프랑스 주재대사(1862)가 되면서 안목이 넓어졌고, 1862년 국왕 빌헬름 1세가 군비확장 문제로 의회와 충돌하였을 때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되었다.

취임 첫 연설에서 이른바 '철혈정책(鐵血政策)' 즉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결정된다” 고 하여 의회와 대립한 채 군비확장을 강행하였다.

결국 1864년, 1866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독일연방을 결성하였고, 나아가 1870~1871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독일 통일을 이룩하였다.

1871년 독일제국 총리가 되어 1890년까지 이 지위를 독점하였다.
경제면에서 그는 보호관세정책을 써서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을 도왔으나
, 정치면에서는 융커와 군부에 의한 전제적 제도를 그대로 남겨놓았다.

그는 통일 후 외교면에서 유럽의 평화유지에 진력하였으며, 3제동맹, 독일-오스트리아동맹, 3국동맹, 이중보호조약 등 동맹과 협상관계를 체결하여,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고립화를 꾀하고 독일 지위를 튼튼하게 함으로써 국력을 충실히 하려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투르크전쟁(1877) 후에는, 베를린회의를 주재하여‘공정한 중재자’의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많은 반대 세력이 있었는데, 특히 남독일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도를 억압하기 위하여 1872년 이후 ‘문화투쟁(Kulturkampf)’을 벌여 왔으나 실패하였고,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자진압법(1878)을 제정하는 한편, 슈몰러 등의 강단(講壇)사회주의 사상을 도입하여 사고·질병·양로보험 등의 사회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사회주의 세력은 증가하고 결국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원래 현상유지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를 확장하여 아프리카에 토고· 카메룬(1884), 독일령 동(東)아프리카(1885)등을 경영하였다.

그의 집권 아래 독일 공업은 유럽에서 가장 발전하였으므로, 비스마르크시대 말기에는 그의 평화정책에 반대하는 제국주의자가 늘어갔다.

1888년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비스마르크는 곧 그와 충돌, 1890년에 사직하였다.

그의 《회상록 Gedanken und Erinnerungen》(3권,1898~1919)은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

'철과 피'의 연설 덕에 무자비한 이미지로 잘 알려져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 개인적으로는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잘 알려진 야사인 '늪지에 빠진 친구를 구하는 법'이라는 에피소드에서 보이는 냉철함과, "정치가는 신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할 뿐이다." 등의 말에서는 보이는 겸손함이 진정한 모습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철과 피'의 이미지를 뒷받침하는 두 번의 전쟁(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과 프러시아-프랑스 전쟁)을 보아도, 외교적으로 할 만큼 한 다음에야 최후로 선택한 수단이었고, 대 오스트리아전에서는 빈 공격을 강제로 저지하고, 대 프랑스전에서도 파리 포격을 비난하였던 점을 볼때, 단순히 폭력에 굶주린 모습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모습이었지만, 의도는 아니었더라도, 역설적으로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를 최초로 실시했다는 점이 또 재미있기는 합니다.

또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에, 40년동안 유럽에 전쟁이 없었다는 점도 단순과격파 이미지로만 볼 수 없는 하나의 증거가 아닐지.

하튼, 치밀하고 (상대에 따라) 겸허한 성격이라고 생각되어 배울 점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 Tirpiz, 티르피츠 [Alfred von Tirpitz, 1849.3.19 ~ 1930.3.6]

프로이센 문관의 아들로 태어나, 1865년 해군에 입대하여 어뢰정(魚雷艇)의 발전에 노력하였다.

1892년 해군 작전부장, 1897년 해군장관이 되면서 영국 해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함대협회의 운동을 이용, 대함대의 계획적 건조를 추진하여 독일을 세계 제2위의 해군국으로 만들었다.
1914 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처음부터 전 함대의 출격과 무제한 잠수함작전을 주장하다가 온건파인 재상 B.홀베크와의 의견충돌로 해군장관을 사임하였다.

1917년 W.카프와 함께 독일조국당을 창립하였고, 1924~1928년 독일국가국민당의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 1925년 P.힌덴부르크가 대통령에 취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저서에《회상기 Erinnerungen》(1919)가 있다.
확장주의자였던 빌헬름
 2세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함대법을 입법화하고, 1900년과 1906년에 걸쳐 각각 이전 계획의 2배가 넘는(그러니까 4배-_-) 함대증강계획을 수립하여 이를 성사시키는 수완을 보입니다.

또한 제독 휘하에서 훈련받은 독일 해군장병들은 대전발발 후에 여러 전투에서 훌륭한 기량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의 함대증강계획은 1차대전때 독일이 패배한 주 요인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3. Scharnhorst, 샤른호르스트 [Gerhard Johann David von Scharnhorst, 1755.11.12 ~ 1813.6.28]


샤른호르스트는 현재 세계의 각 군이 운용하고 있는 참모본부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프러시아 장군이다.

1755년 하노버에서 태어났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마침내 18세에 사관학교에 입교했다.
1784 년에 소위로 임관한 그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영국의 요오크공(公)의 군을 따라 벨기에에서 싸워 혁혁한 무훈을 세웠으며, 메닌 요새 사령관 폰 해머슈타인 장군의 참모장으로서 수비군의 요새탈출을 성공시켰다.

이러한 공로로 하노버군 총사령관 폰 워얼모오덴의 참모장이 되어 `장교응용군사과학'을 편찬하고 `전장용 군사노트'를 출판하였다.

그 밖에 `혁명전쟁에서 프랑스군 승리의 원인에 관하여' 등 유명논문을 발표했는데, 당시 그는 가장 유명한 군사잡지의 편집자이기도 하였다.
1797년 중령으로 진급한 그는 1800년 가을 프러시아 왕에게 전입 청원서를 제출한다.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던 그는 청원서에 당당하게 세 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는데, 첫째 요구는 중령 대우를 원하는 것이고, 둘째 요구는 자신을 귀족에 포함시켜 달라는 것이며, 셋째 요구는 프로이센 육군의 개혁을 시행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1801년 프러시아로 군적을 옮긴 그에게는 귀족 대우와 함께 프러시아군 개혁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이에 따라 육군회를 조직하여 시대 감각에 맞는 전쟁지휘법과 군사제도에 관한 의견교환의 도장을 만들었다.
당시 인접 국가들을 보면 프랑스군은 중앙에 참모본부를 두지 않고 군· 군단 및 사단의 업무능률을 올리기 위해 일반부대 참모부를 운영했을 뿐, 모든 작전계획은 나폴레옹 자신이 세웠으며 영국에도 정규 참모본부제도는 없었다.

그러나 프러시아는 전쟁이 있을 때마다 잠정편성 운용했던 참모본부를 상설 정규조직으로 설치, 군대를 움직일 지역을 사전 숙지케 하기 위해 참모장교의 필수 교육항목에 여행을 반영, 참모장교와 부대소속 장교의 정기적 교체, 중간 개입자 없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참모총장이 국왕을 배알할 수 있는 직접상주권 등을 골자로 하는 통합적 참모본부안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참모본부장의 권한 분야는 대폭적으로 확대되어 최고전쟁회의의 군사 부문과 기술부대 부문의 장을 겸임하였으며 조직도 확대되어 21명의 장교로 편성되었다.
1813 년 프랑스로부터의 해방전쟁에서 샤른호르스트가 은밀히 준비해 둔 독일군 참모본부의 능력을 시험할 최초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때 샤른호르스트 자신은 익명의 신념을 고수하여 스스로 전쟁 최고사령관직을 사양하고 대중의 인기를 모으고 있던 브뤼헤르 장군에게 양보하였다.

그러나 그로브-괴르센 전투와 바우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투에서 입은 부상을 회복하지 못한 채 오스트리아를 전쟁에 개입시키기 위한 협상을 목적으로 프라그에 갔다가 패혈증으로 1813년 6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여러차례 프러시아군 최고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항상 겸허하게 이를 사양하고 작고 보람있는 일로 자신을 만족시켰다.

이러한 인품이 성공적인 개혁을 가능케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맞는 비유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군대에 끌려가 2년 넘게 뺑이를 치고 제대 후에는 1년에 1번씩 정기적으로 끌려가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 이 사람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원한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 이전의 용병제도 대신 국민개병제를 취할 수 밖에 없게 만든 요인은 프랑스 대혁명이니까요.

또한 국민개병제와 더불어 만든 유명한 제도인 참모본부는 이후 히틀러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유능한 지휘관을 많이 배출한 효율적인 제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수하고 실용적인 성격으로, 윗 글에서 보다시피 자수성가의 표본이 될만한 행동과 겸손함을 갖춘 인격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인에게 남긴 글에서 "사람 죽이는 일을 해야 하는 군인은 싫다"는 표현으로 전쟁은 반대하지만, 일단 전쟁터에 나아가서는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4. Gneisenau, 그나이제나우 [August Wilhelm Anton Neithardt von Gneisenau, 1760.10.27 ~ 1831.8.23]

예나 전투에서 패배한 후로 슈타인, 샤른호르스트 등과 함께 군제개혁(軍制改革)에 힘써 프 로이센 군대의 근대화에 성공하였다.

해방전쟁이 일어나자 블뤼허의 참모장이 되어 나폴레옹 1세에게 대항하였으며,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나중에 베를린 총독 ·원수(元帥)가 되었으나, 1831년에 폴란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단 사령관으로서 출정하던 중 포젠(Posen)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독일전함의 이름들을 보면 위의 샤른호르스트와 같이 따라다니는 이름으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이후의 프러시아 해방전쟁 때에 G. L. 폰 블뤼허의 참모장으로 1813년의 라이프 치히 전투, 1814년 프랑스에서의 전투, 1815년의 워털루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의 중앙돌파를 적절히 수습하여 물러난 다음에 결정 적인 순간에 웰링턴 군을 공격하던 나폴레옹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지배자의 부활을 무산시 킨 프러시아군의 우회기동은, 단순히 세월의 영향으로 기력을 상실한 나폴레옹의 실수만이 아닌, 상황을 예측하고 군을 그렇게 움직인 그의 전략적 식견의 결과라고도 합니다.


5. Deutschland , Lutzow

독일
 [獨逸, Deutschland]


잘 아시다시피 국명입니다.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1940년 2월 뤼초우로 개명을.

프레이헤르 본 뤼초우
 [Freiherr von Lutzow, 1782 ~ 1834]


프러시아의 장군.

그는 지원병으로 이루어진 일명 검은 부대(Black Troops) 혹은 검은 라 이플들(Black Rifles)을 지휘하여 1813-14년의 프로이센 독립전쟁때에 사이의 나폴레옹 1 세의 부대들과 싸웠다.

그 부대들은 그들의 용감한 공적으로 그 구성원 중 한 명이엇던 시 인 칼 테오도어 코너(Karl Theodor Korner)에 의해 칭송되어졌다고 합니다.







6. Scheer, 쉐르 [Reinhard Scheer, 1863.9.30 ~ 1928.11.26]

1863 년 9월 30일 하노버(Hanover)의 오베른키르첸(Obernkirchen)에서 태어났습니다.

1879년 독일 해군에 입대하여 1907년에 전함의 함장이 되었는데, 1890년대동안 어뢰분야에 있어 권위자 위치에 있었습니다.

1910년 헤닝 본 홀젠도로프(Henning von Holzendorff)에 의해 이어 대양함대 본부장 직에 임명되었고, 1913년에 제2함대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제독은 잠수함의 일관되고 강력한 지지자였는데
, 1914년 8월 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에서의 잠수함의 가치를 과대평가하여, 무제한 잠수함전을 벌임으로서 후에 중립국인 미국이 대전에 참전하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제독의 계획은 미끼로서 잠수함을 바다 한 가운데에 근처에 풀어, 이를 사냥하러 오는 영국 함선을 대양으로 끌어내어 사냥함으로서 상대의 약체화를 노리는 계획이었습니다.
1916 년 1월 휴고 본 폴(Hugo von Pohl)제독의 뒤를 이어 대양함대 사령관으로 승진되었고, 전임자에 비해 공격적인 성향의 제독은 영국 대함대와 일전을 벌이기 전에 상대를 분리하여 격파하는 방법으로 그 수를 줄이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그 첫번째의 시도가 1916년 5월31부터 6월 1일에 걸쳐 일어난 유틀란트 해전(Battle of Jutland)입니다.

제독의 대양함대는 의도와는 다르게 존 젤리코(John Jelico)제독의 더 강력한 영국 대함대를 맞았는데, 화려한 전투기동으로 패배를 면하고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해전의 결과라면 독일의 전술적 승리, 영국의 전략적 승리로, 무승부로 평가받고 있는데. 전과면에서는 독일이 더 앞서지만, 영국 대함대의 위압감 때문에 이후 제독과 황제인 빌헬름 2세는 무모한 대양 진출을 시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영국 해군 입장에서는 독일 해군의 대양 진출을 가로막는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918년 8월 8일 제독은 홀젠도로프 제독의 황제에 의한 마지못한 퇴임의 뒤를 이어 해군총사령관에 임명됩니다.

그리고 해군에 대한 일관적 명령구조 구축에 들어갑니다. 역사적으로 자살공격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1918년 10월의 영국함대에 대한 공격 계획이 1918년 10월 30일 킬(Kiel)군항의 해군폭동으로 좌절된 직후, 제독은 11월 9일 황제에게 불려가 해군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됩니다.

공식적으로는 이후 바이마르 정권 수립 이후인 한 달 후에 해임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은퇴 이후
 1919년 '세계대전때의 독일의 대양함대(German's High Seas Fleet in the World War)' 라는 책을 저술하고, 1928년 11월 26일 65세의 나이로 마르크트레드위츠(Marktredwitz)에서 타계합니다.


7. Graf Spee, 그라프 본 쉬페 [Maximilian Graf von Spee, 1861 ~ 1914.12.8]

코펜하겐 출신으로, 1878년에 독일 제국해군에 입대하였습니다.

1887~88년 사이에 독일의 식민지인 카메룬의 항만 사령관이었고, 1914년 전쟁 발발 직전까지 다종다양한 무기개발에 관여하였으며, 1908년 북해함대 사령부의 장으로 임명되었고, 1910년 소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12년 독일 아시아 순양함대의 사령관으로 발령되었습니다.
갑작스런 전쟁 발발을 맞아 제독의 순양함대는 영국의 상선과 병력수송선을 사냥하며 명성을 떨쳤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추적해 온 크레독(Sir Christoper Cradock)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를 맞아, 1914년 11월 1일 칠레 앞바다의 코로넬 해전(Battle of Coronel)에서 영국함대보다 포술과 훈련에서 월등한 모습을 보이며 2척의 영국 장갑순양함을 격침시켰습니다.

이에 발칵 뒤집어진 영국 해군은 제독의 함대 격멸에 총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후 제독은 석탄보급을 받고 본국으로 회항하면서 포클랜드(Falkland) 섬 포트 스탠리(Part Stanly)의 무선통신소와 석탄보급시설을 기습하려 하였는데, 마침 섬에서 보급중이던 스트루데(Fredrick Sturdee)제독이 이끄는 영국의 순양전함 부대와 교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사정거리와 화력과 속력 모든 면에서 열세인 제독의 함대는 교전끝에 6척이 모두 침몰당했으며, 제독을 포함한 2천2백명의 승조원이 수장되었습니다.


8. Hipper, 히퍼 [Franz von Hipper, 1863 ~ 1932]

1912 년부터 독일 대양함대 정찰함대를 이끌었으며, 1914년 전쟁이 시작되자, 제독은 전쟁 벽두에 그의 순양전함 함대로 북해 해상에서 기습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1914년 12월 영국 해안도시인 스카보로우(Scarborough)에 과감한 기습 포격을 단행하여 영국을 뒤집어놓아, 영국 해군이 시민과 여론에게 낮잠자고 있었냐는 비아냥을 듣게 만듭니다.
제독은 재차 순양전함 함대로 영국 해안을 기습하려 하였으나
, 이번에는 단단히 대기하고 있다가 독일 해군의 무선을 감청하여 사전에 습격사실을 눈치채고 뛰쳐나온 비티(David Betty)제독의 순양전함 함대와 1915년 1월 도거뱅크(Dogger Bank)에서 격렬한 해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 교전에서 노련함과 행운으로 빠져나올수 있었던 제독은, 이후 1916년 5월 31과 그 다음날에 걸쳐 벌어진 유틀란트 해전(Battle of Jutland)에서, 전초 순양전함 함대를 맡은 제독은 영국 전초 순양전함 함대를 맡은 비티 제독과 다시 교전하여 상대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후 본대끼리의 교전에서는 선봉에서 자살공격에 가까와보이는 과감한 기동으로 독일 본대를 가진 영국 본대의 우세한 화력에서 구해내는 탁월한 활약을 보입니다.
1918 년 쉐르 제독의 승인하에 영국함대에 대한 자살에 가까운 마지막 출격을 준비하였는데, 킬(Kiel)군항의 해군폭동때문에 작업은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전후 대해함대의 연합군에 대한 항복을 지휘한 다음 1918년 12월 공식적인 활동에서 은퇴하여 은거생활에 들어갔습니다.


9. Blcher, 블뤼허 [Gebhard Leberecht von Blcher, 1742.12.16 ~ 1819.9.12]

로스토크 출생.

1756년 처음에는 스웨덴군(軍)에 복무하였으나 7년전쟁(1756~1763) 때 프 로이센군의 포로가 된 이래 프로이센군으로 복역하였다.

1793∼1794년의 대 프랑스 전쟁 에서 전공을 세우고, 1794년 하(下)라인지구군단 사령관, 뮌스터 군정장관이 되었다.

1806 년의 예나 전투에서는 후방 사령관이 되어 군을 지휘하였고, 틸지트조약 후에는 포메라니아 군 사령관으로서 프로이센 개혁과 해방전쟁을 주장하다가, 1811년 나폴레옹 1세에 의해 파면되었다.

1813년 해방전쟁의 개시와 함께 프로이센 ·러시아 연합군의 사령관이 되어 각 지에서 선전(善戰)하였으며,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격파, 1814년 3월 파리에 입성하였다.
그의 신속 과감한 작전을 높이 평가하여 이 때부터 그를 ‘전진 원수(前進元帥:Marschall Vorwrts)’라고 부르게 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자 다시프로이센군의 야전군 사령관이 되었고, 워털루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나폴레옹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등 해방전쟁의 최종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해방전쟁의 영웅으로 불렸다.


10. Prinz Eugen, 오이겐 [Eugen, Prinz von Savoyen, 1663.10.18 ~ 1736.4.21]

파리 출생.

백작 E.모리스와, 프랑스의 재상 J.마자랭의 질녀 만치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성직자로 예정되어 아베드 사보아라고 하였으나, 이를 루이 14세가 거절하자 1683 년 적국인 오스트리아로 가서 군인이 되었다.

그 해 빈까지 쳐들어온 터키군을 물리친 이래 동유럽 여러 곳을 비롯하여 북이탈리아 ·남프랑스 ·플랑드르 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1693년 원수가 되었다.
에스파냐의 계승전쟁에서는 영국의 J. 말버러공(公)과 제휴함과 동시에, 영국 ·네덜란드 해군의 강력한 힘을 빌어 상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였다. 1706년 토리노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라쉬타트조약의 전권대사, 네덜란드총독을 지내면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만년에는 폴란드의 계승전쟁에도 참전하였다.

한편 회화 ·도서의 수집가로서도 유명하였고, G.W.라이프니츠와 서신왕래도 있었다.

그는 카를 6세 치하에서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는 오스트리아의 융성을 구축하여,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사실상의 국왕’이라는 찬사를 받아 ‘프린츠 오이겐’으로 칭송되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괴롭히는 최고의 능력자가 된.

당시의 국가관이라는 개념이 약하기는 하였지만, 재미있는 인생을 가진 장군이자 정치가입니다.

후일 나폴레옹이 꼽은 7 대 전략가중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11. Schlesien, 슐레지엔 [Schlesien]

중부 유럽의 역사적 지역 이름으로
...
면적 약 5 만 6천km2. 오데르강(江)의 상류 및 중류 지역을 가리키며, 폴란드어로는 실롱스 크, 체코어로는 슬레스코, 영어로는 실레지아라고 한다.

대부분이 폴란드령이지만 체코의 수데티산맥 남쪽 기슭이 포함된다.

슐레지엔의 대부분은 산지이며, 남쪽에는 크르코노셰산맥이 있고, 오데르강 연안의 저지는 기름진 땅이다.
석탄(코 크스용의 질이 좋은 흑탄) ·철 ·납 ·주석 ·구리 등의 광석이 있어서 역사상 이 지역의 귀속은 언제나 크게 문제시되었다.

슐레지엔은 중세 이래로 보헤미아(체코)와 폴란드의 세력에 번갈아 귀속되었다.

지명은 반달족(族)의 한 부족의 이름에서 비롯되지만 나중 에는 슬라브인의 거주지가 되었다.
보헤미아에 속하게 된 것은
 10세기의 볼레스와프 1세 때였으며, 12세기 이후에 폴란드의 피아스트가(家)에 의하여 세분되었다.

14세기 초, 얀 루첸브루스키 때 트렌친 조약으로 슐레 지엔 전체가 보헤미아의 영토가 되었다.

그 후 1742년까지는 보헤미아의 일부였으나 마리 아 테레지아가 프로이센에 패배하자 그 대부분이 할양되어 1920년까지는 독일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1921 년에는 주민투표에 따라 상(上)슐레지엔은 폴란드에 속하게 되고, 프루친스코는 베르 사유조약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 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全)슐레지엔이 독일 의 점령하에 들어갔으나, 전후에는 나이제강(江)까지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오늘날 체코 영 토 내의 중심은 오스트라바이며 석탄과 철광의 산지로 알려져 있다.
한편
, 폴란드령 슐레지엔(면적 5만 2000 km2)의 상슐레지엔 공업지대는 폴란드 중공업의 중심이며, 폴란드 강철의 95 %, 기계의 70 %, 전기 에너지의 50 %를 생산하며, 석탄 ·철 ·납 ·주석 ·구리 등의 광업 외에 전통적인 섬유 ·화학 ·유리 ·도자기 ·목공 등의 산 업이 활발하다.

농업으로는 밀 ·사탕무 ·감자가 재배되고, 광천원(鑛泉源)을 활용하는 수 많은 온천이 있다.


12. Holstein, 슐레스비히홀슈타인 [Schleswig-Holstein]

독일 북부의 주로
...
주도(州 都)는 킬이다. 면적 15,770㎢, 인구 274만 9600명(1997)이다.

남쪽 경계는 엘베강 (江)이고, 북쪽은 유틀란트반도의 일부를 차지하여 덴마크와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발트해 (海), 서쪽은 북해에 면한다.

또 실트·헬골란트 등의 섬도 이 주에 포함된다.

지형은 홍적 빙하(洪積氷河)의 영향이 크고, 대부분이 발트 빙하퇴적지대에 속한다.

동부는 농경지와 숲 이 우거진 구릉지로 호수가 많으며, 서부는 저습한 초지(草地)여서 낙농이 성하고, 북해 쪽 에는 넓은 간척지가 있다.

북부에 덴마크인(人)의 소수집단이 있다.
이 지역은 복잡한 민족 관계와 지리적 조건 때문에 독일· 덴마크 간의 국제분쟁이 끊임없었다.

아이더강(江)을 경계로 주의 북반과 덴마크 남부 쇠네리윌란주(州)를 포함한 슐레스비 히지방과 주의 남반, 엘베강과 아이더강 사이의 홀슈타인지방이 1866년 프로이센의 한 주 로 강제 통합되었다.

슐레스비히지방은 12세기 이후로 덴마크 공작령이었고, 홀슈타인은 1111년 신성로마제국의 한 주로서 탄생하여 1815년 이후 독일연맹에 속하였다.
제 
1 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20년 슐레스비히의 북쪽과 남쪽에서는 분리선거가 있었고, 결과 북쪽은 덴마크에, 남쪽은 독일에 속하게 되었다.

제 2 차 세계대전 후 독일지역의 슐레스 비히와 홀슈타인은 서독의 한 주로 편입되었고, 동·서독 통일과 함께 현재에 이른다.

종교적으로는 주민의 약 90 %가 프로테스탄트이고 6%가 가톨릭교도이다. 주도 킬 이외에 소설 가 T.만이 태어난 뤼베크, 시인 슈토름의 출생지인 후줌 등이 유명하다.

킬과 뤼베크에서는 조선공업 ·연안어업 등이 성하다.